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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토/하시마다]염향(染香) 十四






十四

 


어깨 위로 올라갔던 목검이, 절도 있게 아래로 내려쳐진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검을 든 손이 준비 자세와 정확히 동일한 위치에 멈춰섰다. 이미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이 관자놀이를 거쳐 턱까지 방울져 흘러내렸다. 긴 머리카락은 흰 비단끈으로 단정히 묶여 있었다. 하시라마는 차분히 숨을 내쉬고, 다시 목검을 들어올렸다. 삼천 삼백 일곱, 삼천 삼백 여덟, 삼천 삼백 아홉......

 



“누가 보면 무사이신 줄 알겠습니다.”

 



하시라마의 옆에서 검을 잡고 있던 청년이 말했다. 턱에 큰 흉터가 둘이나 있어 다소 거친 인상이 느껴지긴 했으나, 꽤나 준수한 얼굴이었다. 삼천 삼백 오십 번을 다 채우고 난 후에야 하시라마는 목검을 내리고 얼굴에 흐른 땀을 대충 닦아냈다.

 


“영주님께서 일주일에 몇 번이고 이렇게 훈련하시는 걸 보면, 다른 녀석들도 설렁설렁하지는 못할 텐데 말입니다.”

“그리 부르지 말아주게나. 난 아직 영주가 아닐세. 견습에 불과할 뿐이지. 내가 와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하시라마의 목검을 억지로 빼앗다시피 받아 든 청년은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하시라마 님. 하시라마 님과 토비라마 님 모두 소년 시절부터 그 하무라 공께 직접 지도받으셨지 않습니까? 두 분 다 지금까지 단련을 게을리하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고 말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건 잡념을 없애는 데 그만이니 말일세. 요즘은 그리 자주 할 수도 없지만......”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청년이 대화에 쑥 끼어들었다.

 



“혹시 그 잡념이라는 건......사쿠라마치의 유남과 관련있는 것이 아니십니까?”

“카가미! 영주님께 그 무슨 무례한 질문이냐!”

 



턱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그를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카가미라 불린 남자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얼굴로 묘한 웃음기를 담으며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퍼지진 않았으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돌부처 하시라마 님께서 스이센카야의 유남에게 한눈에 반하셨다구요.”

“카가미!!”

“뭐 어때서 그러나, 단조. 경사스러운 일이잖나, 하시라마 님께서 연모하는 상대가 생기셨다는 건. 그 상대도 뭐, 애인감으로 따지자면 하시라마님께는 딱이지 않은가. 경하드립니다, 하시라마 님.”

 



단조라 불린 남자가 그를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자, 카가미는 알겠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하시라마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몸이 지칠 만큼 단련을 했는데도 기억 속의 그 얼굴은 지워지질 않는다. 재미있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카가미 대신 단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하시라마 님. 이 녀석이 아직도 수련하던 때 버릇을 못 고쳐서......”

“괜찮네. 그런데 시무라, 혹시 눈빛이 매섭고 왼쪽 눈 위로 흉터가 있는 자를 아는가? 보기와는 다르게 젊은 청년처럼 보였네만......”

 



하시라마는 문득 집무실로 들어왔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순간 단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녀석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이보게, 단조. 그도 어엿하게 한 사람의 무사로서 인정받은 사람일세. 그 녀석이라니......”

“아무리 실력이 있다곤 하지만 근본도 뭣도 알 수 없는 놈이 아닌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을지, 뭘 저질렀을지 어찌 알겠는가. 그런 놈을 호위로 들이다니 토비라마 님의 의중을 당최 알 수가 없네.”

 



카가미는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한 단조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청년은 약 이 년 전부터 토비라마의 휘하의 무사가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최측근의 호위 무사까지 올라갔다는 모양이었다. 빨라도 지나치게 빠른 승진이라 주변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지만 토비라마는 사전에 그 인사에 대한 이의 제기를 차단해버렸다고 했다. 무사로서의 실력은 확실한 듯 했으나 단조의 말로는 그의 검은 무예(武藝)가 아닌 살법(殺法)에 가깝다고 했다.

 



“그래서 이전에는 토비라마 님의 취향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었지요.”

 



하지만 그가 결코 직위까지 주어 곁에 두고 탐할 정도의 미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좀 잦아들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 외의 설명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는지 토비라마를 모시는 시동들과 결투 직전까지 간 모양이었다. 카가미는 아직도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그 남자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 듯 했지만 단조는 그 반대였다.

 



“『달의 눈』을 일망타진할 중요한 역할이건만......난 아직도 납득할 수 없네.”

“이 사람아, 좀 긍정적으로 보게. 그런 목석같은 사내가 아니라면 누가 사쿠라마치 같은 곳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나?”

 



하시라마는 순간 멈칫했다. 단조가 입술을 깨물며 카가미를 응시했고, 카가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시라마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설명해보게.”

 

 










검은 먹을 듬뿍 묻힌 붓이 종이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마다라는 손을 천천히 빼어 벼루 위에 붓을 올려놓았다.

 



春風雙涕淚 봄 바람에 두 줄기 눈물 흘리며

獨臥萬山中 홀로 깊은 산속에 누워 있다네1

 


“오이란, 오이란ㅡ쇼히ㅡ!!!”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토메소데 신조(留袖新造)2인 시구레와 미오리가 몹시 놀란 표정을 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쇼히의 옆에서 먹을 갈고 있던 요우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 얼굴이 그래요?”

“허억......헉......야에, 야, 야에가, 야에가......”

 



시구레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죽었어.”

 



요우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산챠(散茶) 언니 말이에요!? 왜요? 지금까지 별 일 없었잖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 애만 죽은 게 아냐, 손님도 같이 죽었다고. 둘 다 방 안에서 시체로 발견됐어. 독이 든 술을 마신 것 같대.”

“그냥 독도 아니라던 걸! 마와시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술 속에 피마자(蓖麻子)가 왕창 들어있었다나 봐. 한 모금만 마셨어도 살아나기 힘들었을 거라고 했어.”

 



요우키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마다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다라의 눈에서는 조금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오이가 그렇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라쇼몬에 쫒겨나서는 삼 일도 못 버텼잖아. 따라가려고 한 게 틀림없어. 곧 죽어도 꼭 붙어있으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미오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말없이 있던 시구레가 고개를 들며 소리를 낮춰 말했다.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무슨 소문? 뭐 있었어?”

“아오이가 그렇게 되기 전에, 애를 가졌었대.”

“애? 설마 그게 야에 애란 말야?”

“누가 알겠어?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여기서 태어난 이상 유남이나 유녀 중 하나가 될 건데.”

“어쩐지, 그래서 정신을 놨던 거구나. 아오이가 죽고 나서도 멀쩡한 줄 알았는데 역시 완전히 맛이 가 있었던 거였어.”

 



마다라가 담배연기를 내뿜자 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따위로 소란을 피우며 들어와서는 하는 말이란 것이, 그런 잡담거리일 뿐인 것이더냐? 내 너희들에게 그리 시간이 많은 줄 몰랐구나.”

 



마다라의 눈이 가늘어지자 시구레와 미오리는 얼굴색을 바꾸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쇼히! 잘못했습니다! 그게 아니고......”

“네, 네, 그래요 쇼히! 야에가 죽은 것만 말하려고 온 건 아니에요. 실은 쇼히의 나지미인, 그, 화공인지 뭔지 하는 사람 말인데요......”

“화공......우타마로 나리 말이에요?”

 



요우키가 반문했다. 미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알거지가 됐대요. 도박에 빠져서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잃었다나 봐요. 아직 유명세를 잃진 않은 것 같지만......”

“흥, 예전하고는 비교가 안 되던 걸. 며칠 전에 타마기쿠야 근처에서 마주쳤는데, 완전 거렁뱅이 몰골이었어. 그런데도 나한테 쇼히에게 꼭 전해달라면서 편지를 주잖겠어. 웃기지도 않지! 상황이 바뀐 것도 모르나 봐?”

 



시구레는 같잖기 그지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말없이 담뱃대를 물고 있던 마다라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더 할말은?”

“네? 아......”

“없으면 꺼지거라. 너희들은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느니라.”

 



마다라의 냉기어린 말투에 흠칫한 신조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분하다는 듯이 숨을 색색거리던 요우키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너무해요. 아오이 언니가......라쇼몬에 가게 되지만 않았어도, 그런 엿같은 손님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이런 일은.......”

“고작 정인(情人)이 죽었단 이유로 그렇게 될 놈이었으니, 어차피 오래 못 갔을 것이니라. 개죽음당하기 딱 좋은 놈이 아니냐? 손님을 죽일 배짱이 있으면 다른 곳에나 쓸 것이지......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요우키는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려 분한 눈으로 마다라를 노려보았다. 소년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쇼히는......어떻게 그렇게 차가운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어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복도를 걸어다니던, 우리랑 같이 얘기를 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 죽었다구요!! 그런데 어째서......”

 


“그래서, 무엇이냐?”

 



마다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가 움직이자 옷감이 사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눈물이라도 흘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적어도 애도 한 마디는 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더냐?”

“죽었잖아요......야에 언니가 죽었잖아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죽은 거잖아요......!”

 



마다라는 차갑게 웃으며 요우키를 응시했다.

 



“죽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외인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 몇백 명이 죽었는 줄 아느냐? 이 사쿠라마치에서 하루에만 몇 명이 죽어나가는지 알고 있느냐? 사람이란 말이다, 베이고 찔리는 것으로만 죽는 게 아니다. 외로워도 죽고 괴로워도 죽고 슬퍼도 죽고 절망해도 죽는다. 목숨이란 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아느냐?”

 



마다라의 손이 요우키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요우키는 숨이 막혀 헉헉거리며 눈물 맺힌 눈으로 마다라를 쳐다보았다. 늘 작은 흔들림도 없이 가라앉아 있던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사나운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스스로 지는 길을 택한 놈을 내가 왜 애도해야 하느냐? 그럴 가치도 없는 놈에게 왜 내가 눈물을 낭비해야 한단 말이더냐?”

“으으......흑.....끄윽.”

“죽으면 지는 것이다. 포기해도 진다. 도망쳐도 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진 것은 아니다. ......이기지는 못해도, 진 것은 아니란 말이다.”

 



요우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자 마다라는 그제서야 손을 풀었다. 요우키는 바닥에 쓰러져 캑캑거렸다. 마다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뱃대를 입에 물고 몸을 돌렸다. 한참 만에야 요우키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켜 세우자, 마다라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오늘 텐카이가 들를 것이다. 지난번처럼 물건 값을 치르고 오거라.”

 



유난히 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마다라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이 마을은, 그 안의 수많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다라는 담배연기를 뱉으며 나지막이, 미처 쓰지 못한 싯구의 뒷부분을 중얼거렸다.

 



“......世事不堪說 세상 일 차마 말은 못하지만

心悲安可窮 슬픔이 어찌 끝이 있을 것인가.“







 




  1. 김육(金堉, 1580~1658)의 시 유감(有感) 일부.
  2. 후리소데 신조와 동년배이나 카무로에서 고급 유녀가 되지 못하는 유녀. 보통 십대에 유곽으로 팔려온 탓에 카무로 시기를 건너뛰는 경우가 많았다. 원칙적으로 손님을 받지 않는 후리소데 신조와 달리 손님을 받았으며, 오이란의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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