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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토/하시마다]Cineraria 66(完)

 

 

109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있던 하늘은 이젠 완전히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한결 더 매서워진 바람은 신이 났다는 듯 추위를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을 할퀴었다. 목도리를 하지 않은 목덜미가 휑했다. 누군가의 차가운 손길이 교복 와이셔츠 속으로 들어와 몸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손에 들려 있는 비닐봉지를 힘주어 잡았다. 아직 손이 시릴 정도는 아니지만, 춥다. 보온성이 취약한 교복만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자 달린 코트를 위에 입고 오지 않았다면-이즈나는 꼭 입고 가라며 고집을 부렸었다-, 말 그대로 덜덜 떨면서 집까지 갔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봉지 안의 물건들을 하나 하나 세어보며 꾸깃꾸깃 접혀진 영수증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거스름돈 액수는 이미 확인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았다. 적립 카드도 제대로 가져왔고 빼놓은 물건도 없었다. 꽤나 묵직한 비닐봉지 안에는 당근, 양파, 시금치 등등을 비롯한 음식 재료들과 작은 초콜릿 같은 간단한 간식이 들어있었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 보면 머리가 멍해지는 일이 많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뭔가 입에 물고 있어야 했다. 큰길을 걷던 나는 순간적으로 눈 앞이 흐물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발을 멈췄다. 아직 머리가 좀 어지러웠지만, 시야는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즈나에게 부탁을 받고 왔다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던 카가미 씨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제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을.......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헛웃음이 나왔다. 나오는 대로 뱉은 말이긴 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이제, 라는 건 이전에는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일 텐데.......왜 그 사람을 잊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지금 네 말은 잊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잊어야만 한다는 것 같아.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잊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잊어야만 하는 것.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왜냐하면...... 

 

 

더 이상은, 예전과 같을 수 없으니까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미 나도 하시라마도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녀석과 나 사이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과거의 흔적뿐이었다. 내가 알던 하시라마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 녀석을 보기 위해서는 태엽이 다 된 오르골을 되감듯이, 머릿속의 시계를 돌려야만 했다. 지금의 하시라마는 내가 아는 하시라마가 아니었다. 추위에 움츠린 내가 서 있는 이 거리를 함께 걸었던 하시라마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띠며 내 옆에 있어주었던 하시라마는 이제 없었다. 가슴이 다시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도망치는 거니? 

 

 

카가미 씨는 그렇게 말했다. 도망친다. 달아나고 있다. 녀석에게서, 나는 다시 도망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도망치는 게 아니야.  

 

 

아니, 넌 도망치고 있어. 마다라, 넌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거야. 무서우니까.  

 

 

무섭다, 고......? 무엇이? 

 

 

넌 지금 겁을 내고 있을 뿐이야.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니까 무서운 거다. 그 사람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변할까봐, 그 사람이 너를 버릴까봐 두려운 거야. 넌 그 사람과 멀어지고 싶어서,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어서 잊으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찬바람에 노출된 손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손을 고쳐잡았다. 나는 코트 주머니 속에 숨기고 있던 다른 쪽 손을 들어 눈 앞에 펼쳤다. 색깔은 집에서만 자란 화초라도 되는 양 창백하기만 한 흰 빛이었지만, 손바닥은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인해 다져진 굳은살이 깊게 배어있었고 작은 상처 자국도 몇 개 보였다. 하얗게 튼 손은 곱게 자란 학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다. 문득 하시라마의 손이 떠올랐다. 거의 매일 검을 잡은 탓에 손바닥이 굳은살로 덮여있었지만 나처럼 거칠지는 않았다.하시라마는 그 손으로 시합에서 몇 번이나 승리를 거머쥐었었다. 그 때 그 녀석이 나에게 지었던 미소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마다라, 네 자신에게서 도망쳐선 안 돼.  

 

 

어째서, 라고 묻고 싶었다. 눈 앞에 칼날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다면 그건 얼간이다. 나는 그 칼이 내 심장 안까지 난도질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도 왜 나는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 겁쟁이. 그래, 나는 겁쟁이다. 카가미 씨가 말한 대로다. 무섭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마다라』  

 

 

그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 무서웠다. 예전처럼 나를 봐주지 않을 것이 무서웠다. 더 이상은 내 옆에 남아있지 않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전부 다, 떠나간다. 내 옆에 변함없이 있어주는 사람은 이즈나 뿐이었다. 이즈나가 있었으니까, 나는 혼자여도 괜찮았다. 처음에는 녀석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조금 특이한 녀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이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결국은 괜찮아 질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너는, 정말 그 사람을 잊고 싶은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내가 그 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잊고 싶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기충격기를 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그 녀석은......그 녀석에 대한 생각은 지금 내게 쓰라림과 비참함, 혼란스러움밖에 주지 못한다. 잊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마조히스트가 아닌 이상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잊고 싶다. 잊어야만 한다...... 

 

 

제길......! 

 

 

원하지......않아! 싫다. 잊고 싶지 않다. 그 녀석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이 내게 준 기억들은, 그 녀석과 함께 했던 기억들은 나에게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 것들이었다. 간신히 막아놓았던 기억의 파편들이, 물밀 듯이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절박한 얼굴로 나를 붙잡고 고백하던 하시라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아무리 많이 보더라도 절대 질릴 것 같지 않았던, 그 녀석의 밝은 웃음이 눈 앞에 가득 찼다. 그 녀석이 없을 때엔 낯설기만 했던 넓은 병실. 함께 누워 봤던 암청색의 밤하늘. 처음이었는데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도시의 야경. 가로등의 어두운 주황빛 밑에 드러났던 얼굴. 그 얼굴에 남아있던 초록빛의 멍과 붉은 상처. 녀석과 거리를 나설 때 보였던 밝고 요란스러웠던 거리. 어두운 실내에서 어지럽게 빛나던, 노래방의 화려한 불빛들. 그 안에서 울려퍼지던 하시라마의 웃음 섞인 낮은 목소리. 그 모든 기억들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 하시라마의 모습과 합쳐진다. 나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부숴버릴 듯이 세게 움켜쥐었다. 너무나도......뚜렷하다. 힘들 때마다 나를 받아주었던 그 녀석의 단단한 어깨가, 무슨 말을 하든 끝까지 들어준 따뜻한 눈동자가, 단호하지만 언제나 상냥했던 손길도.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그 녀석을 신경쓰고 있었던 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 열었다. 뻣뻣한 손가락은 생각만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왜 진작에 단축번호로 저장해 놓지 않았던 건지 후회스러워졌다. 젠장, 왜...... 

 

 

『♩♪♬♩♪♩』 

!!

 

 

휴대폰 화면에는 「센쥬 하시라마」가 떠 있었다. 익숙한 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에게나 그 녀석에게나, 가사는 한참 전에 모두 외워버렸을 정도로 낯설지 않은 노래다. 나는 번호를 누르던 손을 멈춘 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손가락은 통화 버튼 주변에서 죽은 것처럼 멈춰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달이 나 있었던 주제에,지금은 계속 그러기라도 했던 것처럼 태연한 척이나 하고 있다니. 나는 손을 움직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대려던 나는, 관자놀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때처럼.  

 

 

...... 

『마다라?』

......하시라마.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휴대폰 너머로 조금씩 들려오는 하시라마의 약간 거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달리는 도중에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나는 검은 봉지와 손에 하얗게 쌓이기 시작한 눈을 바라봤다. 이미 차가워진 손에 내려앉는 눈에는 깃털같은 무게감만이 있었다. 하시라마는 뛰는 것을 멈춘 것 같았다. 숨소리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어디야?』 

.......알아서 뭐하게.

 

 

잠긴 목소리가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차라리 퉁명스러운 말투였으면 좋았을 텐데 넋이 나간 것 같은 어조라 바보같이 들렸다. 하시라마는 한동안 침묵했다.  

 

 

『......보고 싶어서.』  

 

 

가슴을 울리던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귓가에 내려앉는 눈의 차가운 감촉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차의 경적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먼 곳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발소리는 처음부터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 녀석의 목소리만이 있었다. 하시라마는 다시 말했다.  

 

 

『보고 싶어, 마다라.』  

......

『보고 싶어......』


 

 

떨리는 목소리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 가지 말만을 녹음해 놓은 테이프처럼 「보고 싶다」는 말만이 재생되고 있다. 나는 동작을 멈춘 고물 라디오 같았다. 내 입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답하지 못하는 건, 입을 열지 못하는 건 소리가 새어나갈까 두려워서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의 펌프소리가 들릴까봐 무서워서다.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눈발은 계속 늘어나고, 내 어깨에는 솜뭉치 같은 눈더미가 쌓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옅은 노란색 불빛만이 비추고 있는 골목길이 보였다. 이 길은,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나였다. 나는 그 때보다 조금 더 키가 컸고, 몸도 조금은 더 단단해졌다. 목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도 지금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 때는 황망할 정도로 넓어 보이던 그곳은,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서 있었다.  

 

그 때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무릎을 끓고 있지 않았고 울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눈이 내리고 있었고, 추웠다. 그리고 나는......혼자였다.  

 

바닥에 쌓인 눈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문득 그 발소리가 어딘지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발소리가 멈췄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나는 휴대폰을 닫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나를 바라보던 하시라마는 한 걸음씩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또 도망치는 거냐?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순간 하시라마의 손이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하시라마의 검은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기다려, 라고......  

......!

널 여기서 처음 만났을 때, 분명 그렇게 말했지.

 

 

나는 멈칫했다. 놀라지는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둘 다, 서로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시라마와 나는 그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말하는 일은 없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녀석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번엔 널 보낼 수 없어, 마다라. 보내주지 않을 거야. 

 

 

하시라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플 정도는 아니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응시했다. 하시라마의 손은 힘을 주고 있는 와중에도 작게 떨리고 있었다. 바보 자식. 잡혔을 때 이미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기는 글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그러고 싶지 않았다.  

 

 

...... 

그 날 이후로......난 널 잊을 수가 없었어. 그 때의 네가 너무 슬퍼 보여서, 아파 보여서...... 네가 울고 있는 모습이, 계속 생각났어.

 

 

나는 말없이 하시라마를 쳐다봤다. 나 역시 하시라마와 다르지 않았다. 왜 그 날이 특별했는지, 왜 지금까지 기억 속에 이렇게 또렷하게 남아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나와 하시라마는 어렸고, 나 스스로도 하시라마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같은 고등학생으로 만났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얼굴을 마주칠수록 느껴지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익숙하다, 라......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단 한번밖에 만나지 않은 녀석이었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 때 난......그냥 널 위로해주고 싶었어. 네가 더 울지 않을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

하지만 넌 가버렸고, 난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어. 혹시라도 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네가 웃고 있기를 바랐어. 학교에서 널 만나고 나서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조금이라도 더 웃었으면 좋겠다고. 그 때보다는 더......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라마의 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물론 난 네가 행복하길 원해. 지금보다 더 즐겁게 웃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

 

 

하시라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순수하게 직선으로 뻗어오는 시선에, 나는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난 네가, 나한테 웃어주길 바라.  

 

 

두근, 가슴의 고동이 반응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난 네가 나한테 웃어줬으면 좋겠어. 정확히는......내 앞에서만 웃어줬으면 해.

말했을 텐데. 그런 말은......

너 외의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아!

 

 

하시라마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나는 놀란 눈으로 하시라마를 바라봤다. 하시라마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널 좋아해. 아니, 사랑해. 다른 사람이 아닌 널......우치하 마다라를 사랑해.  

 

 

하시라마는 다른 손으로 봉지를 들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올렸다. 하시라마의 손에 녹아 있던 따스한 온기가, 차갑게 굳어있던 손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눈을 들어 하시라마의 눈을 응시했다. 하시라마의 눈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 밑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시라마는 흠칫 놀라며 손에 들어가 있던 힘을 뺐다.  

 

 

......미안해. 내 멋대로 굴어서. 

......

이게 마지막이야. 네가 싫다고 하면, 더 이상은 이런 말 하지 않을게. 너한테는 가까이 가지도 않을게.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그러니까, 대답해줘.

 

 

나는 나를 잡고 있는 하시라마의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내가 놓으라고 말한다면 분명 하시라마는 이 손을 뗄 것이다. 이젠 화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나같은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나는 하시라마에게 잡힌 손을 조금 움직였다. 하시라마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의지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하시라마는 내 손의 작은 움직임 하나로 쩔쩔매고 있었다. 대체 하시라마는 왜......나를 원하는 걸까.  

 

 

......말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야.  

마다라.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녀석이 내게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연결되어있었던 걸까. 이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건가.  

 

 

나는, 나는......예전이 좋았어, 하시라마. 그냥 평범하게......웃고 떠들고, 공부하는 날들이. 내가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날들이었으니까. 그 때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 날들은 없어지지 않아, 마다라. 나도 여기 있고, 너도 여기에 있잖아?

아니야! 이제 넌, 달라졌어. 달라져버렸잖아! 네가 널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해. 네가 나한테 그 말을 한 순간부터 우리가 즐겁게 보냈던 시간은 끝난 거였어. 그래서 난......널 용서할 수 없었어.

 

 

처음에는 하시라마만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나도 변해 있었다.  


 

마다라...... 

난......이제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진짜, 모르겠어. 네가 나 같은 걸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대체 네가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어. 하시라마, 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 내가......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널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하시라마는 내 손을 감싸듯이 잡았다.  

 

 

마다라, 날 봐. 

......!

난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넌 이미 내가 원하는 걸 줬어. 지금도 주고 있고.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마다라.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거야. 지금까지 네가 그래왔던 것처럼. 더해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도 봐줬으면 좋겠어.

......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나한테 하는 거야. 네 옆에는 나 같은 게 아니더라도 여자들 천지잖아.

 

 

하시라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우치하 마다라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말은 누가 한 건지 모르겠군.  

뭐.....!

마다라, 넌 왜 자꾸 널 깎아내리는 거야? 난 네가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가끔씩 이런 자폭하는 건 단점이지만. 게다가 난 너한테 반한 사람이야. 지금 나한테 네 결점 같은 게 보일 거라고 생각해? 아, 브라콘 남동생에 본인이 브라콘인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인가......

무슨.......!!

그러니까, 자기비하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널 좋아하는 내가 기분이 나빠지니까. 그리고 말했잖아.

 

 

하시라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나,는......  

마다라, 넌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아? 내가......보고싶지 않았어?

 

 

제기랄, 저런 질문은 반칙이다.  

 

 

난 네가 보고 싶었어, 마다라. 매일매일 보고 싶었는데, 네가 날 보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멀리서 잠깐씩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넌 정말,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짓궂기 짝이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옆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이 없어졌을 때의 그 공허함은, 그리움은 습관적으로 찾아오는 통증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심장 속에 날카로운 돌이 박힌 것 같은, 그런 아픔이었다. 나는 하시라마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충동적으로 넥타이를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

 

 

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따뜻한 온기가 입술을 녹였다. 하시라마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놀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입술에 닿아있는 하시라마의 감촉을 음미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하시라마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순식간에 깊숙이 침입해온 혀가 입 안을 헤집었다. 마치 굶주린 것처럼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하시라마에게 나는 진정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각도를 바꿔 입을 맞추며 달래듯이 혀를 움직였다. 하시라마는 조금씩, 천천히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입술을 뗐을 때, 하시라마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키스......잘하네.

......닥쳐.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혀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얼얼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처음인가 의심될 정도로 녀석은 키스를 못했다.

 

 

방금 그건......yes로 봐도 되는 거야? 마다라.

 

 

나는 대답 없이 시선을 피했다. 지독한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젠장, 왜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말해. 결정되었다면, 말해야 한다. 망설이지 마.

 

 

......난 이즈나를 사랑해, 하시라마.

 

 

나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가 나한테 바라는 건 그것과는 다른 거겠지. 하지만 난 아직, 네가 말하는 ‘사랑’이라든지, ‘좋아한다’는 의미가 어떤 건지 몰라. 지금까지 내가 사랑한 사람은 이즈나뿐이었어. 날 사랑해준 사람도......이즈나뿐이었고. 나는 그 외의 사랑이란, 몸으로 하는 것 밖에 알지 못해. 그게 다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계속 사랑이란 감정을 외면하고, 무시해왔다. 그것이 나를 향하는 감정이었다 할지라도 냉정하게 끊어냈었다. 그런 감정들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게 그런 말을 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단지 나를 동정한 것뿐이었다. 연민도 아닌 동정이었다. 설령 그들 중 몇몇이 정말 사랑이라고 불릴 법한 감정을 내게 품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들에게 섹스 외의 것은 줄 수 없었다. 오랜시간 동안 지치고 상처입어 약해진 마음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 따위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내게 처음으로 온기를 주었던 상냥한 소년,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따스한 눈동자의 청년 앞에서. 그는 내게 온 힘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손목을 빼면서 하시라마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 녀석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 이 녀석이 내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이 손을......놓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나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나였다. 그걸 깨닫게 해 준 사람은, 하시라마였다.  

 

 

모르면 같이 배워가면 돼, 마다라. 그리고 그런 건 너무 신경 쓰지 마. 난 네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걸. 지금 난 행복해. 이렇게 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행복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야.

......

잠깐만, 마다라. 그 말은.......역시 yes한 거구나!!!

 

 

하시라마는 기적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상태로 하시라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하시라마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하시라마 특유의 맑은 체취가 기분 좋게 코를 건드렸다.

 

 

고마워, 마다라! 나......잘할게. 항상, 네 옆에 있을게.

!!으윽......알았으니까 그만해!

 

 

나는 하시라마의 가슴을 밀었다. 아쉬운 듯이 내게서 떨어진 하시라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시라마를 올려다보려던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마다라, 너 귀가 빨간데ㅡ 하시라마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하시라마를 노려봤다.

 

 

......어쩔 생각이야.

음?

 

 

이렇게 된 이상,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생각해봐도 부딪히게 될 문제는 한 둘이 아니었다.

 

 

너 미토라는 여자애랑 거의 약혼한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쪽 어른들은......

미토하고는 따로 얘기했어.

......!

 

 

하시라마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드러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했지. 미토한테는......내가 정말 못할 짓을 했어.

......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 그렇지만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

 

 

나는 손을 뻗어 하시라마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다. 하시라마는 흠칫 놀란 얼굴을 하다 슬픈 웃음을 지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마다라......

......

마다라......

 

 

그렇게 부르지 마, 제길...... 나는 하시라마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가슴 속에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은......

 

 

이즈나한테는, 어떻게 말하면 되는거지......

그쪽은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문제라면 내 가족들이지.

 

 

알기는 아는군. 말하지 않는 편이 제일 좋겠지만, 이 녀석의 일인 이상 그쪽에서 모를 리가 없다. 숨기는 것은 아마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하시라마는 나를 마주보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마다라. 이건 우리 일뿐만 아니라 나하고 아버지 사이의 문제도 있어. 어차피 의대에 진학하려면 충돌은 피할 수 없어. 이왕 터질 문제라면 한꺼번에 매듭짓는 편이 나아.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계속 고민해 왔던 하시라마라면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시라마는 내 어깨에 기대며 편안하다는 듯이 뺨을 비볐다.나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하시라마를 떼어냈다.

 

 

......마다라? 왜 그래?

2주간은 접근 금지다. 반경 10m 안으로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 갑자기 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시라마의 표정을 본 나는 기가 막혔다. 이 미친 새끼가......누굴 엿 먹이려고.

 

 

넌 시험 걱정도 안하냐?

아.....

아?

 

 

내가 얼굴을 구기자 하시라마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시험 때까지는 얼굴 보는 일 없게 해. 시험 끝나고 보자.

......문자나 전화는 안 돼?

그건 돼...... 젠장, 그런 거 물어보지마!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하란 말이야!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하시라마는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이 자식이.......사람 말을 좀 들어!

......마다라.

......!!

 

 

하시라마의 입술이 내 입술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내게, 하시라마는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윽.....

 

 

나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던 손으로 하시라마의 머리를 때렸다. 하시라마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아픈 소리를 냈다.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얼마나 세게 때렸다고. 하시라마는 나를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정말로,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녀석 같다. 빈틈투성이다. 하지만......내 모습도 아마 지금의 녀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시라마는 내 손에 깍지를 끼었다. 눈을 오래 맞아 녀석도 나도 온몸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하시라마와 닿아 있는 손에서만은, 여전히 포근한 따뜻함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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